고쿠보 히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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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쿠보 히로키는 와카야마 현 출신으로,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을 졸업하고 1993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했다. 프로 선수로 1994년부터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었다. 1994년에는 홈런왕을 차지했고, 2004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소속으로 40홈런을 넘기기도 했다. 2011년에는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2012년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13년부터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2017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팀을 이끌었다. 2020년에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헤드코치를 거쳐 2군 감독을 역임했고, 2024년부터 1군 감독으로 팀을 지휘하며, 취임 첫 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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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보 히로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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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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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 1루수/3루수/감독 |
팀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등번호 | 90 |
출생일 | 1971년 10월 8일 |
출생지 |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타석 | 우타 |
송구 | 우투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NPB |
데뷔 일자 | 1994년 4월 9일 |
데뷔 팀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
최종 일자 | 2012년 10월 8일 |
최종 팀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통계 (NPB) | |
타율 | 0.273 |
안타 | 2,041 |
홈런 | 413 |
RBI | 1,304 |
소속 팀 | |
선수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4–2003)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4–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7–2012) |
감독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2013–2017) |
코치 및 감독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21–현재) |
수상 | |
골든 글러브 수상 | 3회 (1995년, 2010년, 2011년) |
베스트 나인 수상 | 3회 (1995년, 1997년, 2011년) |
월간 MVP | 3회 (2000년 6월, 2004년 7월, 2007년 4월) |
컴백 선수상 | 2004년 |
일본 시리즈 MVP | 2011년 |
올스타 선정 | 11회 (1995–1997, 2000–2002, 2004, 2007–2009, 2011) |
메달 | |
올림픽 | 1992년 바르셀로나 동메달 |
기타 정보 | |
모국어 표기 | (Kokubo Hiroki) |
참고 자료 | 닛칸 스포츠: 소프트뱅크 고쿠보 2000안타 달성 |
2. 프로 입단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경합 끝에 다이에 호크스를 역지명하여, 1993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등번호는 '''9'''번, 연봉은 1200만엔, 계약금은 최고액인 1.6억엔이었다(금액은 추정).[2]
2. 1. 학창 시절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에서 태어나 와카야마 시립 세이와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소속되었다. 와카야마 현립 세이린 고등학교를 거쳐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 진학,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통산 40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 9푼 1리, 8홈런, 23타점을 기록했다. 1993년에는 팀의 주장으로 발탁되어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다.[2]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예선 리그에서 2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후에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나 제이슨 지암비가 소속된 미국과의 맞대결에 승리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는데, 여기서 고쿠보는 선제타를 포함한 2개의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면서 팀 승리에 기여했다.
대학 시절 3학년 위에는 나라하라 히로시, 3학년 아래에는 이구치 다다히토가 있었다.
2. 2.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야구에 대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선출되어 예선 리그에서 2개의 홈런을 날렸다.[11] 이후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하는 노마 가르시아파라와 제이슨 지암비를 보유한 미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선제 적시타를 포함한 2개의 적시 2루타로 승리에 기여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3. 프로 선수 시절
고쿠보 히로키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일본을 대표하는 강타자 중 한 명이었다. 2001년과 2004년에 40개 이상의 홈런을 쳤지만, 리그 홈런 1위는 1995년에 단 한 번 기록했고, 당시 홈런 수는 28개였다. 1997년에는 리그 타점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3년, 팀의 4번 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갑작스럽게 트레이드되었다. 자이언츠가 호크스에 선수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무상 트레이드된 셈이었다. 이 트레이드의 동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4]
2011년, 팀 주장으로서 2011년 일본 시리즈에서 호크스의 우승을 이끌었고,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6]
2012년 6월 24일,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여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중 41번째로 이 기록을 달성했다.[1] 8월 14일, 2012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의사를 밝혔다.[7] 은퇴식은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 후인 10월 8일에 열렸다.[8]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4년 ~ 2003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2004년 ~ 2006년)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2007년 ~ 2012년)
; 국가 대표 경력
- 바르셀로나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1992년)
3. 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1994년 ~ 2003년)
고쿠보 히로키는 1994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994년, 스프링 캠프에서 다카바타케 미치히로 타격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개막전에 6번·우익수로 출전했지만 6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이후에도 뚜렷한 활약은 없었지만, 7월 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소노카와 가즈미로부터 34경기, 67번째 타석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타율 2할 1푼 5리, 6개의 홈런을 기록한 후 시즌 종료 후 하와이에서 열린 ‘하와이 윈터 베이스볼’에 참가해 수위타자와 MVP를 차지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 부임 첫해인 1995년에는 주전 2루수로 전 경기에 출장, 28홈런으로 퍼시픽 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리그 1위인 9개의 3루타와 5할 4푼 8리의 장타율도 기록하며 올스타전 팬 투표 1위로 선정되었다.
1996년에는 쓰노 히로시로부터 데뷔 첫 만루 홈런을 기록하는 등 2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했지만, 타율은 2할 4푼 7리에 그쳤다. 1997년에는 타율 3할 2리, 36홈런, 114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하며 리그 정상급 타자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1998년에는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8주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복귀 후에도 부상으로 17경기 출전에 그쳤다. 1999년에는 어깨 부상 여파로 타격 부진을 겪었지만,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0년부터는 3루수로 고정되어 선수 회장을 맡았고, 2001년에는 44홈런을 기록하며 후쿠오카 돔을 홈구장으로 하는 다이에 선수 최초로 40홈런을 돌파했다. 2002년까지 3년 연속 3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2003년에는 시범경기 중 심각한 무릎 부상을 당하며 시즌 아웃되었고,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무상 트레이드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3. 1. 1. 1994년 ~ 1997년: 홈런왕, 타점왕 등극
小久保 裕紀|고쿠보 히로키일본어는 1994년 신인 시즌에 퍼시픽 리그에 데뷔하여 78경기에 출전했다. 스프링 캠프에서 다카바타케 미치히로 타격 코치의 지도를 받았고, 시범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개막전에 6번·우익수로 출전했지만 6타수 무안타로 부진했다. 7월 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 소노카와 가즈미로부터 34경기, 67번째 타석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고, 시즌 타율 2할 1푼 5리, 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하와이에서 열린 ‘하와이 윈터 베이스볼’에 참가해 수위타자와 MVP를 차지했다. 오 사다하루(그 해 시즌 종료 후 다이에 감독으로 취임)가 하와이 현지로 찾아와 고쿠보는 우승 결정전에서 홈런을 때려 팀 우승을 이끌었다.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한 1995년, 주전 2루수로 전체 130경기에 출전하며 후쿠오카 돔을 연고지로 하면서 28개의 최다 홈런을 기록해 퍼시픽 리그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친구인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이치로(25홈런)를 3개 차로 따돌렸다. 리그 1위인 9개의 3루타와 5할 4푼 8리의 장타율을 기록했다.[111] 그 해 올스타전 팬 투표에서 1위로 선정되어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후루미조 가쓰유키로부터 홈런을 포함한 3안타를 기록했다. 5월 26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4번 타자를 맡았다.
1996년, 쓰노 히로시로부터 데뷔 이후 처음으로 만루 홈런을 때려내며 2년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타격 부진으로 타율 2할 4푼 7리를 기록했고, 팀은 3년 만에 최하위인 6위로 떨어졌다.
1997년, 8월 말부터 1루를, 마지막 남은 9경기에서는 3루를 지켰고, 2년 만에 135경기를 모두 출전하며 타율 3할 2리, 36홈런, 114타점으로 도밍고 마르티네스(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쟁 끝에 타점왕을 차지했다. 2루타 37개, 장타율 5할 8푼 8리, 310루타는 각각 리그 1위를 기록했다. 야구체육박물관에서는 ‘센트럴의 마쓰이 히데키, 퍼시픽의 고쿠보’라는 제목의 포스터 모델로도 등장했다.
그러나 시즌 종료 후 프로 야구 탈세 사건에 연루돼 주범격의 한 사람으로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벌금 7000000JPY을 선고받았고,[112] 일본 야구 기구로부터 8주간의 출장 정지와 벌금 4000000JPY의 징계를 받았다.[113]
3. 1. 2. 1998년 ~ 2002년: 시련과 극복
小久保 裕紀|고쿠보 히로키일본어는 1998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개막 후 8주간 출전 정지 및 벌금 400만 엔의 처분을 받았다.[13] 이로 인해, 하마나 지히로와 이구치 다다히토가 각각 2루수와 유격수로 주전 자리를 굳히면서, 고쿠보는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했다. 출전 정지에서 복귀한 5월 30일, '4번 타자·3루수'로 출전하여 2안타를 기록했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오른쪽 어깨 관절와순 손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결국 17경기 출전에 그쳤고, 홈런 2개, 타율 .225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1999년에는 전년도에 다친 어깨의 영향으로 타격 부진에 시달렸지만, 1년 내내 4번 타자 자리를 지켰다. 3루수와 1루수를 번갈아 맡았다. 팀이 우승을 확정지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전에서는 7회말에 가네무라 아키라로부터 동점 홈런을 치는 등, 후쿠오카 이전 후 첫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최종 성적은 타율 .234, 24홈런, 77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은 팀 내 최고 기록이었다.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4번 타자·3루수'로 전 경기에 출전했다. 3차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했고, 나고야 돔에서 열린 4차전에서는 전년까지 다이에 소속이었던 다케다 가즈히로로부터 홈런을 치는 등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2000년부터는 본격적으로 3루수로 고정되었고, 팀의 선수 회장을 맡았다. 개막 후 6경기에서 6홈런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출발했고, 6월 20일 오릭스전부터 7월 4일 롯데전까지 10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했다.[14] 6월에는 21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타율 .390으로 월간 MVP를 처음으로 수상했다. 8월 30일 경기 종료 시점에서 선두 세이부에 3.5경기 뒤져 있었지만, 팀 선수 회장으로서 경기 전과 후에 선수들만 모아 미팅과 결의 대회를 소집하는 등 팀을 하나로 묶는 데 힘썼다. 팀은 승수를 쌓아 9월 5일에 선두를 탈환했고, 매직넘버 1을 남겨둔 10월 7일 오릭스전(후쿠오카 돔)에서 가네다 마사히코로부터 결승 홈런을 쳐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4차전 이후 허리 통증으로 이탈했지만, 계약 갱신에서 31홈런(리그 5위)과 105타점(리그 3위)으로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억 엔 연봉 대열에 합류했다.
2001년에도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44홈런(리그 4위, 40홈런 이상은 본인 최초)과 123타점(리그 4위)을 기록했다. 후쿠오카 돔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다이에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40홈런을 넘겼다. 이 해에는 마쓰나카 노부히코가 36홈런(리그 6위), 조지마 겐지가 31홈런(리그 9위), 이구치 다다히토가 30홈런(리그 12위)을 기록하며, 퍼시픽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동일 구단에서 4명의 30홈런 이상 타자를 배출했다. 30홈런을 기록한 네 명의 선수가 모두 일본인 선수인 것은 프로 야구 역사상 처음이었다.
2002년에는 3년 연속 30홈런을 넘는 32홈런을 기록했고, 통산 1000안타를 통산 1000경기 출전과 동시에 달성하는 등 활약했지만, 팀은 2년 연속 2위에 머물렀다. 올스타전에서는 우익수, 미일 야구에서는 2루수 등 과거에 맡았던 수비 위치를 소화하기도 했다.
3. 1. 3. 2003년: 갑작스러운 부상과 무상 트레이드
2003년, 고쿠보는 선수 생활에 큰 위기를 맞았다. 3월 6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시범경기에서 1루에서 홈으로 쇄도하다 포수와 충돌하여 오른쪽 무릎 전방 십자 인대 파열, 내측 인대 손상, 외측 반월판 손상, 경골과 대퇴골 좌상이라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5] 완치까지 최소 6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어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재활 훈련에 전념했다. 그 해 1군과 2군 경기 모두 출전하지 못했지만, 팀은 3년 만에 리그 우승과 4년 만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고쿠보는 우승 헹가래에 참여하며 재활을 이어갔다.그러나 2003년 11월 3일, 우승 퍼레이드 다음 날, 고쿠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무상 트레이드되는 충격적인 발표를 접하게 된다.[16] 이 사건은 '''고쿠보 사건'''으로 불리며, 팀 동료와 팬들, 일본 야구계 전체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다이에 선수들은 집단으로 우승 기념 여행을 보이콧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21]
고쿠보의 이적 이유는 당시 다카츠카 타케시 구단 사장과의 의견 불일치, 미국 치료비(약 2000만엔) 미지급 등이 거론되었다.[17] 고쿠보 본인은 2003년 6월 구단에 계약 해지를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무상 트레이드가 된 배경에는 나카우치 마사시 구단주가 요미우리 측에 금전 트레이드 금액을 고쿠보 연봉에 추가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라는 기자 회견 내용이 있었다.[18][19]
고쿠보는 훗날 "트레이드를 요청한 것은 나 자신", "소프트뱅크 호크스 외라면 어디든 좋았다", "무상 트레이드가 된 이유는 모른다"라고 말했다.[20]
마츠나카 노부히코는 "구단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왜 고쿠보 씨를 공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줘야 하는가."라며 분노했고, 시바하라 히로시는 "팀을 이끌었던 것은 고쿠보 씨였기에 팀에게도 큰 타격"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사이토 가즈미는 "선수로서는 모욕당하고 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22][23]라고 비판했고, 조지마 겐지는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와다 쓰요시는 "내년에 (고쿠보가) 없다니 믿을 수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고, 오 사다하루 감독조차 "팀이 붕괴될 것이다"라고 우려했다.[24][25] 심지어 11월 6일 나카우치 구단주가 구장을 방문했을 때 선수들이 인사를 하지 않는 이례적인 상황까지 발생했다.[26]
3.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2004년 ~ 2006년)
2003년 11월 3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무상 트레이드되었다.[16] 등번호는 '''6'''번이었다. 이적 이유는 다카츠카 타케시 구단 사장과의 불화, 미국 치료비 미지급 등이었다.[17] 고쿠보는 구단에 계약 해지를 요청했고, 나카우치 마사시 구단주가 금전 트레이드 대신 고쿠보의 연봉을 인상해주는 조건으로 요미우리와 합의했다.[18][19]고쿠보는 "소프트뱅크 호크스 외라면 어디든 좋았다"고 언급했다.[20] 이 사건은 선수단과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선수회는 우승 여행을 보이콧했다.[21] 마쓰나카 노부히코, 시바하라 히로시, 사이토 가즈미 등 동료 선수들과 오 사다하루 감독은 구단의 결정을 비판했다.[22][23][24][25]
요미우리는 마쓰이 히데키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일본인 장거리 타자 육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고쿠보에게 기대를 걸었다.[27]
3. 2. 1. 2004년: 요미우리 우타자 최초 40홈런
小久保 裕紀|고쿠보 히로키일본어는 나가시마 시게오, 하라 다쓰노리, 오치아이 히로미쓰, 기요하라 가즈히로도 달성하지 못한, 거인의 우타자로서 사상 최초로 시즌 40홈런 이상(41홈런)을 달성했다.[27] 부상 부위에 보조 기구를 착용하고 무릎 관절도 제대로 굽혀지지 않는 상태로 시즌을 맞이하여, 트레이드 마크였던 한 발로 치는 타법에서 무릎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발을 끄는 타법으로 바꾸었다. "3번 타자・3루수"로 한신과의 개막전에 선발 출장하여, 다음 경기에서 후쿠하라 시노부를 상대로 도쿄 돔의 우익석 중단으로 이적 후 첫 안타,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후 성적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지만, 점차 무릎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 5월에는 한 발로 치는 타법으로 돌아가 홈런을 양산했다.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 4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여 7월 월간 MVP를 차지했다. 시즌 중 7월 23일에는 아테네 올림픽으로 이탈한 다카하시 요시노부를 대신하여 거인군 제69대 4번 타자 자리에 앉았다.3. 2. 2. 2005년 ~ 2006년: FA, 그리고 주장
2005년에는 세・퍼 교류전 첫 해에 12개를 기록하여 교류전 초대 홈런왕을 획득했다(타이 기록으로 4명 수상). 5월 3일부터 1경기를 제외하고 전 경기에 4번 타자로 출장했으며,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도이 요시히로를 상대로 프로 입단 후 첫 3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등, 시즌에서는 34홈런을 기록했다. FA 권리를 취득했지만, 이적 당시 2년+1년(구단에 선택권이 있음) 옵션의 최대 3년 계약을 맺었고, 구단이 이 옵션을 행사하여 거인에 잔류했다.2006년에는 거인 대표・기요타케 히데토시로부터 거인군 제17대 주장을 의뢰받았다. 주장 제도는 1998년의 요시무라 사다아키 이후 8년 만의 부활이었지만, 이적 선수의 주장 지명은 처음이었다. 고쿠보의 유니폼 오른쪽 소매에는 15×80mm의 캡틴 마크가 부착되었다. 연봉은 3억엔에 달했다. 개막전에 "6번 타자・3루수"로 출장하자, 4월에는 3경기 연속 포함 9홈런을 기록하여, 팀은 선두를 독주했지만 6월 2일 세이부전에서의 타구 처리 중, 고질적인 오른손 엄지 안쪽 측부 인대 박리 골절로 장기 이탈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28] 그러자 팀도 큰 부진에 빠졌고, 2년 연속으로 B 클래스가 되었다. 8월 18일 주니치전에서 1군 복귀했고, 최종 성적은 88경기 출장에 타율 .259, 19홈런, 55타점이었다. 4번 타자로 출장한 것은 9월 3일 주니치전 1경기뿐이었다.
3. 3.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시절 (2007년 ~ 2012년)
2006년 11월 11일, 고쿠보는 FA를 통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복귀했다. 12월 10일, 고쿠보의 보상 선수로 요시타케 신타로가 거인으로 이적했다.고쿠보는 역지명 제도로 입단한 선수 중 처음으로 FA 권리를 행사하여 국내 이적한 선수가 되었다.
3. 3. 1. 2007년 ~ 2011년: 팀의 정신적 지주
小久保 裕紀|고쿠보 히로키일본어는 2006년 시즌 거인 대표로부터 거인군 제17대 주장을 의뢰받았다. 주장 제도는 1998년 요시무라 사다아키 이후 8년 만에 부활한 것이었지만, 이적 선수가 주장에 지명된 것은 처음이었다.[28] 고쿠보 히로키의 유니폼 오른쪽 소매에는 15×80mm 크기의 캡틴 마크가 부착되었다. 연봉은 3억엔에 달했다. 개막전에 "6번 타자・3루수"로 출장하여, 4월에는 3경기 연속 홈런을 포함해 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의 선두 독주에 기여했다. 그러나 6월 2일 세이부전에서 타구를 처리하던 중 고질적인 오른손 엄지 안쪽 측부 인대 박리 골절로 장기간 이탈하게 되었다. 그 여파로 팀도 큰 부진에 빠지며 2년 연속 B클래스에 머물렀다. 8월 18일 주니치전에 1군으로 복귀했으며, 최종 성적은 88경기 출장에 타율 .259, 19홈런, 55타점을 기록했다. 4번 타자로 출장한 것은 9월 3일 주니치전 단 한 경기뿐이었다.11월 11일, FA를 통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복귀를 발표했다. 12월 10일, 고쿠보 히로키의 보상 선수로 요시타케 신타로가 거인으로 이적했다.
역지명 제도로 입단한 선수 중 처음으로 FA 권리를 행사하여 국내 이적한 선수가 되었다.
3. 3. 2. 2012년: 은퇴
2012년 8월 14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 후 기자 회견을 열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한다고 표명했다.[111] 은퇴 표명 후에도 출전을 계속하여 9월 30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는 10년 만에 2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111] 이는 큰 부상에서 복귀한 2004년 이후 9년째 달성한 1경기 2홈런 기록이었다.[111] 41세 생일인 10월 8일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는 4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111] 경기 전날 고쿠보는 "직구만으로 승부하는 것은 그만두었으면 한다"라고 말했지만, 오릭스 선발 투수 니시 유키는 진검 승부로 도전하여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111] 고쿠보는 무안타로 물러났고, 최종 타석에서는 유격수 땅볼에 그쳤다.[111] 경기 후에는 은퇴식이 열렸다.[111]2012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파이널 스테이지 2차전을 제외하고 선발 출전했다. 10월 19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파이널 스테이지 3차전(고쿠보의 최종 출전 경기) 9회 2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으나 유격수 플라이로 물러나며 경기가 종료되었다. 소프트뱅크의 패퇴로 이것이 고쿠보의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111] 경기 후 양 팀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으며, 11월 29일 임의 은퇴가 공시되었다.[111]
4. 은퇴 후
고쿠보는 은퇴 후 NHK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9]
요미우리로 무상 트레이드된 후, FA 권한을 행사하여 소프트뱅크로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과 기대가 있었다.[98] 고쿠보의 등번호 "9"는 요미우리 재적 동안 준 영구 결번으로 취급되었다.
2006년 1월 1일 니시닛폰 신문에 "고쿠보 2007년 호크스 복귀 결정"이라는 기사가 보도되어 요미우리 측에서 항의하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시기 도쿄 스포츠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이적 가능성도 보도되었다.
2006년 10월 17일,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공항에서 FA 권한 행사 의사를 밝혔고, 11월 7일 정식으로 신청했다.[99] 귀국 기자 회견에서 "다음에 입을 유니폼의 구단에서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했고, 손정의 구단주도 호크스로 돌아오게 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11월 9일 왕정치 감독이 참여한 첫 교섭이 진행되었고, 11월 11일 4년 총액 12억엔에 성과급을 더한 조건으로 친정팀 복귀가 결정되었다. 왕정치 감독이 위 전체 절제 수술 후 수척한 상태에서도 교섭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100]
왕정치 감독은 이적 기자 회견에서 "자이언츠 이적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가장 큰 충격을 받았고, 하루라도 빨리 호크스로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생각했다"고 밝혔다.[101]
4. 1. 야구 해설가 및 지도자
2013년부터 NHK와 서일본 스포츠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9] 공식 사이트를 개설했고, 직접 쓴 자서전이 1월 30일에 발간되었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9]2020년 12월 3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수석 코치가 되었다.[9] 2023년 시즌까지 2군 감독을 맡았으며, 후지모토 히로시 감독의 사임 발표에 따라 2024년에는 1군 감독으로 부임할 예정이다.[10]
4. 2.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2024년 ~ )
후지모토 히로시 감독이 2023년 시즌을 끝으로 사임할 예정임을 발표함에 따라, 고쿠보 히로키는 2024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1군 감독을 맡게 되었다.[10]5. 상세 정보
고쿠보 히로키는 1994년 프로에 데뷔하여 2012년 은퇴할 때까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한 선수이다. 포지션은 주로 내야수였으며, 특히 3루수와 1루수로 많이 출전했다.
1995년에는 홈런왕, 타점왕,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슈퍼 슬러거상을 동시에 수상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7년에도 타점왕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2000년대에도 꾸준히 활약하며 월간 MVP, 컴백상, 도쿄 돔 MVP 등을 수상했다. 특히 2011년에는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통산 400홈런, 2000안타를 기록한 강타자였으며, 수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 골든 글러브상을 여러 차례 수상했다. 특히 3루수로서 210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퍼시픽 리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연도별 수비 성적 ###
연도 | 1루 | 2루 | 3루 | 외야 | ||||||||||||||||||||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94 | 9 | 3 | 7 | 0 | 1 | 1.000 | 15 | 6 | 13 | 0 | 4 | 1.000 | 51 | 69 | 3 | 2 | 0 | .973 | ||||||
1995 | 130 | 304 | 372 | 9 | 75 | .987 | 1 | 0 | 0 | 0 | 0 | ---- | ||||||||||||
1996 | 1 | 0 | 0 | 0 | 0 | ---- | 123 | 291 | 338 | 4 | 81 | .994 | 5 | 2 | 4 | 0 | 0 | 1.000 | ||||||
1997 | 21 | 153 | 13 | 0 | 7 | 1.000 | 106 | 268 | 278 | 6 | 60 | .989 | 11 | 7 | 14 | 1 | 0 | .955 | ||||||
1998 | 6 | 3 | 0 | 0 | 1 | 1.000 | 15 | 9 | 21 | 4 | 7 | .882 | ||||||||||||
1999 | 72 | 500 | 27 | 1 | 38 | .998 | 59 | 36 | 79 | 5 | 8 | .958 | ||||||||||||
2000 | 1 | 9 | 2 | 1 | 0 | .917 | 119 | 78 | 196 | 4 | 14 | .986 | ||||||||||||
2001 | 135 | 110 | 229 | 5 | 25 | .985 | ||||||||||||||||||
2002 | 135 | 101 | 199 | 7 | 16 | .977 | ||||||||||||||||||
2004 | 121 | 79 | 195 | 8 | 15 | .972 | ||||||||||||||||||
2005 | 142 | 102 | 248 | 4 | 21 | .989 | ||||||||||||||||||
2006 | 87 | 57 | 144 | 6 | 17 | .971 | ||||||||||||||||||
2007 | 6 | 58 | 5 | 1 | 2 | .984 | 106 | 58 | 175 | 10 | 27 | .959 | ||||||||||||
2008 | 83 | 673 | 47 | 2 | 48 | .997 | ||||||||||||||||||
2009 | 138 | 1134 | 74 | 8 | 86 | .993 | ||||||||||||||||||
2010 | 108 | 815 | 52 | 2 | 62 | .998 | ||||||||||||||||||
2011 | 75 | 560 | 29 | 1 | 54 | .998 | ||||||||||||||||||
2012 | 90 | 654 | 47 | 3 | 44 | .996 | ||||||||||||||||||
통산 | 607 | 4559 | 296 | 19 | 342 | .996 | 368 | 866 | 995 | 19 | 217 | .990 | 950 | 645 | 1517 | 54 | 154 | .976 | 52 | 69 | 3 | 2 | 0 | .973 |
-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
5. 1.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연도 |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
1992년 | 바르셀로나 올림픽 동메달 |
1995년 | 홈런왕, 타점왕,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슈퍼 슬러거상 |
1997년 | 타점왕, 베스트 나인 |
2000년 | 월간 MVP (6월) |
2004년 | 월간 MVP (7월), 컴백상, 도쿄 돔 MVP |
2007년 | 월간 MVP (4월) |
2010년 | 골든 글러브상[115] |
2011년 |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일본 시리즈 MVP (2011년)[114] |
2012년 | ‘조지아혼’상 (제10회), 퍼시픽 리그 공로상[116] |
5. 2. 주요 기록
## 기록 ##### 첫 기록 ###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94년 4월 9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6번·우익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석·첫 삼진: 상동, 2회 초에 호시노 노부유키로부터
- 첫 안타: 1994년 4월 10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차전(그린 스타디움 고베), 7회 초에 노다 고지로부터 좌월 2루타
- 첫 타점: 1994년 6월 26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3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5회 초에 오노 가즈요시로부터 좌익 희생 플라이
- 첫 홈런: 1994년 7월 5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13차전(기타큐슈 시민 구장), 2회 말에 소노카와 가즈미로부터
- 첫 도루: 1994년 7월 13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13차전(후쿠오카 돔), 7회 말에 2루 안착(투수: 노무라 다카히토, 포수: 다카다 마코토)
### 통산 기록 ###
- 통산 100홈런: 1999년 4월 29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6차전(도쿄 돔), 3회 초에 이와모토 쓰토무로부터 ※역대 202번째
- 통산 150홈런: 2000년 9월 24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26차전(오사카 돔), 10회 초에 오쓰카 아키노리로부터 ※역대 116번째
- 통산 200홈런: 2002년 4월 9일, 대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차전(후쿠오카 돔), 7회 말에 세키구치 이오리로부터 ※역대 75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2002년 9월 17일, 대 오릭스 블루웨이브 25차전(후쿠오카 돔), 4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82번째
- 통산 1000안타: 2002년 9월 27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5차전(후쿠오카 돔), 1회 말에 고토 미쓰타카로부터 좌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211번째
- 통산 250홈런: 2004년 7월 2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6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 초에 사사오카 신지로부터 ※역대 46번째
- 통산 300홈런: 2005년 9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8차전(도쿄 돔), 3회 말에 루이스 마르티네즈로부터 ※역대 31번째
- 통산 1000삼진: 2006년 9월 23일, 대 한신 타이거스 19차전(도쿄 돔), 3회 말에 시모야나기 쓰요시로부터 ※역대 40번째
- 통산 1000타점: 2007년 7월 18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4차전(삿포로 돔), 5회 초에 브라이언 스위니로부터 좌익 적시 2루타 ※역대 30번째
- 통산 1500안타: 2007년 9월 15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9회 말에 에지리 신타로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94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2008년 4월 13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6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5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57번째
- 통산 350홈런: 2008년 4월 30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8차전(세이부 돔), 2회 초에 이시이 가즈히사로부터 좌월 선제 솔로 홈런 ※역대 21번째
- 통산 300개의 2루타: 2008년 9월 7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0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7회 말에 고미야마 사토루로부터 ※역대 50번째
- 통산 1000득점: 2010년 5월 3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7차전(스카이마크 스타디움), 1회 초에 기시다 마모루로부터 좌월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달성 ※역대 37번째
- 통산 350개의 2루타: 2011년 4월 24일, 대 지바 롯데 마린스 2차전(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 1회 말에 미쓰하라 아쓰히로로부터 좌익선상 적시 2루타 ※역대 31번째
- 통산 400홈런: 2011년 5월 12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6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4회 말에 알프레도 피가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16번째
- 통산 3500루타: 2011년 5월 15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6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4회 말에 호아시 가즈유키로부터 우중간 적시 2루타 ※역대 25번째
- 통산 2000안타: 2012년 6월 24일, 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9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4회 말에 브라이언 울프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41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2012년 6월 28일, 대 오릭스 버펄로스 12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6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6번째
- 통산 1500삼진: 2012년 8월 22일, 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17차전(세이부 돔), 4회 초에 기쿠치 유세이로부터 ※역대 11번째
### 기타 기록 ###
- 10경기 연속 타점(2000년 6월 20일 ~ 7월 4일)
- 210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2001년 5월 13일 ~ 9월 9일) ※3루수로서의 퍼시픽 리그 기록
- 통산 만루 홈런: 13개 ※역대 4위 타이
- 골든 글러브상을 재수상할 때까지의 최장 공백 기록: 15년(1995년 ~ 2010년)
- 통산 안타 1999번째 기록일부터 2000개 안타 달성일까지의 최장 일수 기록: 33일(2012년 5월 22일 ~ 6월 24일)
- 올스타전 출장: 11회(1995년 ~ 1997년, 2000년 ~ 2002년, 2004년, 2007년 ~ 2009년, 2011년) ※1998년, 2006년에는 팬 투표로 선정됐지만 부상 때문에 결장[117]
### 연도별 수비 성적 ###
연도 | 1루 | 2루 | 3루 | 외야 | ||||||||||||||||||||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시합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1994 | 9 | 3 | 7 | 0 | 1 | 1.000 | 15 | 6 | 13 | 0 | 4 | 1.000 | 51 | 69 | 3 | 2 | 0 | .973 | ||||||
1995 | 130 | 304 | 372 | 9 | 75 | .987 | 1 | 0 | 0 | 0 | 0 | ---- | ||||||||||||
1996 | 1 | 0 | 0 | 0 | 0 | ---- | 123 | 291 | 338 | 4 | 81 | .994 | 5 | 2 | 4 | 0 | 0 | 1.000 | ||||||
1997 | 21 | 153 | 13 | 0 | 7 | 1.000 | 106 | 268 | 278 | 6 | 60 | .989 | 11 | 7 | 14 | 1 | 0 | .955 | ||||||
1998 | 6 | 3 | 0 | 0 | 1 | 1.000 | 15 | 9 | 21 | 4 | 7 | .882 | ||||||||||||
1999 | 72 | 500 | 27 | 1 | 38 | .998 | 59 | 36 | 79 | 5 | 8 | .958 | ||||||||||||
2000 | 1 | 9 | 2 | 1 | 0 | .917 | 119 | 78 | 196 | 4 | 14 | .986 | ||||||||||||
2001 | 135 | 110 | 229 | 5 | 25 | .985 | ||||||||||||||||||
2002 | 135 | 101 | 199 | 7 | 16 | .977 | ||||||||||||||||||
2004 | 121 | 79 | 195 | 8 | 15 | .972 | ||||||||||||||||||
2005 | 142 | 102 | 248 | 4 | 21 | .989 | ||||||||||||||||||
2006 | 87 | 57 | 144 | 6 | 17 | .971 | ||||||||||||||||||
2007 | 6 | 58 | 5 | 1 | 2 | .984 | 106 | 58 | 175 | 10 | 27 | .959 | ||||||||||||
2008 | 83 | 673 | 47 | 2 | 48 | .997 | ||||||||||||||||||
2009 | 138 | 1134 | 74 | 8 | 86 | .993 | ||||||||||||||||||
2010 | 108 | 815 | 52 | 2 | 62 | .998 | ||||||||||||||||||
2011 | 75 | 560 | 29 | 1 | 54 | .998 | ||||||||||||||||||
2012 | 90 | 654 | 47 | 3 | 44 | .996 | ||||||||||||||||||
통산 | 607 | 4559 | 296 | 19 | 342 | .996 | 368 | 866 | 995 | 19 | 217 | .990 | 950 | 645 | 1517 | 54 | 154 | .976 | 52 | 69 | 3 | 2 | 0 | .973 |
-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든 글러브상 수상 연도
6. 인물
고쿠보 히로키는 유소년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다. 어머니의 권유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70], 초등학교 2학년 때 프로 선수를 목표로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인 야구를 목표로 했으나, 어머니의 권유로 대학에 진학했다.[71]
독서가로 알려진 고쿠보는 1996년 극심한 부진에 빠졌을 때 후나이 유키오의 책을 접하고 그의 저작물을 탐독했다. 20대부터 30대에는 자기 계발서를, 40대 이후에는 역사 소설을 즐겨 읽었다.[72]
왕정치는 고쿠보의 스승이다. 다이에 시절 고쿠보의 실책으로 경기에서 패배한 후, 기자들에게 "저에게는 이게 최선입니다"라고 발언한 고쿠보에게 "우리의 일은 팬에게 꿈을 보여주는 것이다"라며 질책했다. 고쿠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왕정치를 스승으로 존경하게 되었다.[73] 왕정치는 요미우리로 이적한 고쿠보를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모범"이라고 칭찬했으며[74], 2012년 고쿠보가 2000안타를 달성했을 때 명구회 블레이저를 직접 증정하며 "무사도라고 할까 기질로서 낡은 일본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75]
2009년 아키야마 고지 감독에 의해 주장으로 발탁된 고쿠보는 팀 내 유일하게 전 경기 클린업으로 선발 출장했으며, 138경기에서 1루수로 출전했다. 교류전에서는 팀의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했고, 정규 시즌에서는 팀을 3위로 이끌었다.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처음으로 20홈런을 기록했고, 득점권 타율 3할 3푼 6리, 팀 내 1위인 81타점을 기록했다.[70]
고쿠보는 팬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경기 직전까지 사인을 해주고, 팬 사이트를 통해 팬들과 만남을 가졌다.[76] 이벤트 수익금과 사비를 24시간 TV '사랑은 지구를 구한다' 등에 기부하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토크쇼를 개최하여 모금액을 기부했다.[78][79] 농학교를 방문하여 수화로 메시지를 보내는 약속을 지키기도 했다.[70]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선수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캐치볼 프로젝트 발전에 공헌했다.[80]
친동생 고쿠보 다카야는 복화술사 잇코쿠도의 매니저이며, 지벤 와카야마 고등학교에서 투수로 고시엔에 출전했다. 조카 고쿠보 가이에이는 메이슈가쿠엔 히타치 고등학교 내야수로 고시엔에 출전했다.[81]
6. 1. 리더십
학생 시절부터 팀을 이끌었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모두 주장이었다(고등학교 시절에는 투수였기 때문에 부주장).[82] 그의 리더십은 중학생 시절 야구는 단체 경기이며, 전체의 책임은 캡틴에게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주입받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팀으로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전체를 보는 눈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83] 프로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006년에 외부 출신 최초의 주장이 되었으며, 친정팀 소프트뱅크로 복귀한 후에도 2009년에 주장으로 취임했다.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을 3위로 이끌었고, 2010년에는 리그 우승, 2011년에는 퍼시픽 리그 2연패,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패,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아키야마 고지 감독에게도 신뢰받아 "내가 감독을 맡는 동안에는 주장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라고 말하며[84] 2012년 은퇴할 때까지 팀을 A클래스로 이끌었다.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강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많다. 2011년, 오랫동안 고전했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날에는 "한 번도 질 생각은 없습니다. 마지막(6차전)까지 티켓을 구매해 주신 팬 여러분께는 죄송합니다"라고 발언했다.[85] 일본 시리즈에서도 타격으로 최고령 기록을 갱신하며, 수비에서는 적극적으로 투수에게 말을 걸고, 7차전 전에는 원진에서 선수들에게 손을 겹치도록 지시하는[86] 등,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여 일본 시리즈 MVP를 획득했다. 4월 11일, 페넌트 레이스 전날에 "올해는 반드시 일본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 대로, 유언실행을 해 보였다.[87]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의 연습 방법을 바꾼 선수이기도 하다. "우리끼리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고쿠보의 제안에 따라 전체 연습을 줄였다. 대학교 4학년 때 첫 대학 야구 우승을 이끌어내며, 이후 정착된 아오야마가쿠인의 전통이 되었다.[88] 은사 가와하라 이사오는 고쿠보만큼 부원들을 이끌어준 선수는 없다고 언급했으며[89], 은퇴 후에는 "야구계를 이끌 수 있는 남자. 왕(王) 씨는 아니지만 구계를 이끌어주길 바란다. 선두에 서서 해내겠다, 라는 정도의 그릇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극찬했다.[90]
자신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직후 느꼈던 고독을 다른 선수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요미우리에서 복귀한 직후인 2007년에는, 부진에 시달리고 있던 프로 2년차의 마쓰다 노부히로를 식사에 초대하여 조언을 해 주었으며[95], 2011년에 FA 이적해 온 우치카와 세이이치도 마찬가지로 캠프에서 적극적으로 식사에 초대했다. 그 해 8월에 고쿠보 본인이 골절로 이탈했을 때에는 우치카와가 고쿠보의 배팅 글러브를 빌려 출전, "존경하는 고쿠보 씨가 없는 동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96] 우치카와는 2015년에 고쿠보 은퇴 이후 공석이었던 주장을 맡아, "이 팀에서 캡틴의 무게는, 고쿠보 씨가 은퇴한 후부터 느꼈다. 팀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고 싶다"라고 책임감을 드러냈다.[97]
6. 2. 사회 공헌 활동
고쿠보는 팬과의 교류를 중요하게 여겨 후쿠오카에서 경기가 있는 날에는 경기 직전까지 사인을 했다.[76] 또한, 자신의 공식 팬 사이트 "K'Project"를 통해 2004년부터 매년 오프 시즌에 100명 이상의 팬과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주로 토크와 노래가 있는 디너 쇼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여러 가지 서프라이즈를 준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여러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숨어서 기다리거나, 일본 전통 의상이나 드라큘라 복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77] 2010년에는 리그 우승을 기념하여 팬들과 탄산 파이트를 하기도 했다.이벤트에서는 경매 등을 열어 마련한 사비와 함께 24시간 TV '사랑은 지구를 구한다'나 미야자키현의 구제역 피해에 의연금을 보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K'Project를 통해 2011년 3월 26일에 토크쇼를 개최했다. 갑작스러운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소프트뱅크 호크스 1군 선수 거의 전원과 피해 지역인 도호쿠 지방을 연고로 하는 라쿠텐 선수들(시마 모토히로, 이와쿠마 히사시, 다나카 마사히로 등)이 참가했다. 행사 종료 후 모금을 실시하여 총 3750000JPY을 기부했다.[78][79]
2005년 4월 8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가와카미 겐신으로부터 시즌 첫 홈런(만루 홈런)을 쳤을 때, TV 카메라를 향해 "약속을 지켰어"라고 수화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는 전년도 오프 시즌에 다카하시 요시노부와 함께 농학교를 방문했을 때, 첫 홈런을 치면 수화로 메시지를 보내기로 한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이 내용은 스포츠 우르구스에서 보도되었다. 2006년 4월 1일 요코하마전에서 도이 요시히로에게서 솔로 홈런을 쳤을 때도 같은 수화를 보냈으며, 이 일은 칼비 프로 야구 칩스 2005년 제2탄 카드에도 기록되었다.
2005년 12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사단법인 선수회 제10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공원에서도 가볍게 캐치볼을 할 수 있는 "유 볼"을 만드는 등 캐치볼 프로젝트 발전에 기여했다. 4년간의 재임 기간은 오카다 아키노부, 다쓰나미 가즈요시에 이어 세 번째로 긴 기간이었다.[80] 후임 이사장은 이바타 히로카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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